생명수호 동영상 공모전

제1회 '생명수호 생명사랑' 체험수기 우수작 - 산부인과 의사로 살며 생각하며

관리자 | 2016.08.10 13:21 | 조회 2483

산부인과 의사로 살며 생각하며



김성심(아녜스, 서울 여의도동본당)


일곱성사 중 하나인 혼인성사로 우리 교우들은 생명체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 교우가 아니더라도 모든 인류의 생명을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주님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며 …"(지혜 16,13)


 1957년에 의대를 졸업한 저는 19년간 산부인과 전공의 및 전문의로 일했습니다. 성 라자로 마을에서 나환자들을 오랜 기간 돌보시다 선종하신 이경재 알렉산델 신부님께서는 제가 의대를 다니던 시절, 흑석동본당 신부님으로 계시며 교리를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후 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지켜보고 이를 위해 일하는 것이 좋아 산부인과를 전공하게 됐습니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된 후 분만실, 신생아실 등에서 자연유산되거나 사산, 혹은 출생직후 사망하게 되는 아이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당시 이경재 신부님께서는 유산되는 거의 무형의 태아에게도 대세를 주라고 하셨으며,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지속적으로 일깨워 주셨습니다. 이러한 신부님 가르침은 늘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기에 자연유산되는 태아에게 대세를 줬으며, 생사와 성별이 확실치 않을 때에는 조건 대세를 주었습니다. 무뇌아 등 여러 가지 기형을 갖고 거의 만삭으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대세를 줌으로써 아기의 부모님들뿐 아니라, 제게도 많은 위로가 됐습니다.


 천주교 신자로서 산부인과 의사 입장에 있던 제게 닥쳤던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자궁외 임신 환자가 생명에 위협을 느껴 응급수술을 요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자궁외 임신은 거의 대부분 난관임신이었는데, 이 중 난관이 파열돼 복강 내에 피가 철철 고인 상태로 환자가 응급실로 오곤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파열된 난관을 태아가 들어 있는 채로 자르고 봉합해야만 피가 멈출 수 있는 응급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체인 태아를 해치는 것은 가톨릭교회에서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 급하게 수술에 들어가기 직전, 흑석동본당 보좌신부님으로 계셨던 김수창 야고보 신부님께 전화로 말씀을 여쭙고 응급수술을 시행하곤 했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가 엄하다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동격인 인간의 손으로 함부로 해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천주교 교리에 따라 환자에게 인공유산을 행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에 따라 제 아이들 다섯을 낳고 키웠습니다. 친정 아버님도 "너희 아이들이지만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자녀를 잠깐 너희에게 맡기시는 것이니 소중하게 낳아 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교리에 따르는 일일 뿐 아니라 생명에 대한 참된 정의를 생각해 본다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부모들은 저항하지 못하는 제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였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조상들의 손으로 그들을 멸망시키시어…"(지혜 12,6).


 생명에 대해 제가 배운 지식과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명의 정의는 제가 배운 교리로는 난자와 정자가 결합된 순간부터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태중에 있는 아기의 태동을 느끼는 것이 임신 18주부터인데, 그 때 어머니는 적극적으로 생명체에 대한 친근한 애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18주 전에 그 아이는 하느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낙태시키는 경우는 강자가 약자를 죽이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동물도 제 새끼를 보호하는데,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탯줄을 통해 어머니만 믿고 모체에 단단히 붙어있는 생명을 어떻게 무서운 연장을 써서 마음대로 해친다는 말입니까? "너의 생명인 피를 흘리게 하는 자에게 나는 앙갚음을 하리라"(창세 9,5).


 많은 사람들은, 1970년도 중반에 우리나라 인구가 너무 팽창한다고 해서 정부 산하 '가족계획협회'가 적극적인 산아제한을 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민방위훈련 소집에 참가하는 수많은 젊은 남성들에게는 "아들, 딸 가리지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 아래 특정한 혜택을 주면서까지 무료로 정관 결찰 수술을 받도록 권장하는 적극적 행사가 이뤄졌습니다. 
 한편,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당시 구호의 본뜻이 무엇이었는지, '이미 생겨난 생명을 죽이면서까지 자녀의 수를 조절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즉, 당시 제가 근무를 하던 병원에선 임신 3개월까지는 임신 중절을 원하는 임신부에게 임신 중절의 소파수술과 더불어 무료 복강경 수술로 난관을 소작(전기로 태움) 단절, 또는 결찰하는 방법으로 불임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때, 저는 가톨릭 신자로서 생명을 앗아가는 일을 함께 할 수 없어 19년간의 산부인과 의사 생활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병리학 전공의를 뒤늦게 시작했습니다. 제가 모 대학병원에서 병리과를 수련하던 당시, 소아과 외래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선생님!"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7~8살 된 아이를 데리고 진료를 기다리던 어머니가 제게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어떻게 이 병원으로 옮기셨어요? 먼저 병원에 계실 때 이 아이를 유산시키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유산은 안 된다고 낳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렇게 컸어요! 얼마나 예쁜지요!" 그 어머니는 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못 기쁜 표정이었습니다. 
 항상 인공유산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달을 채워 낳기를 권유해온 터이므로, 얼마나 기뻤던지요. 그리고 내 권유로 태어나게 된 아이를 한번 더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그렇게도 탐스러운 아이가 그만 예리한 기구로, 그것도 어머니의 동의 하에 무참하게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신문지상을 비롯한 언론매체에서는 유괴라든가 살인 등의 특정한 사건뿐만 아니라, '꺼져가는 한 생명을 구하자'는 캠페인과 함께 질병으로 죽어가는 하나의 생명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대서특필하는 등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격으로 인공유산이라는 방법으로 참혹하게 희생되는 생명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수태한 모체의 보호는커녕, 그 모체에 손을 대서 태아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을 생각할 때에 안타깝기만 합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태어나는 한 생명과 모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 합니다. 모체와 태아의 생명을 안전하게 하고자 제왕절개를 하기도 하며 난산으로 질식 상태에 빠진 신생아를 소생시키고자 신생아실의 소아과 의사와 함께 온갖 힘을 다 합니다. 실낱같은 한 가닥 희망을 안고 한 신생아의 생명을 건져보려고 밤새도록 지켜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무슨 까닭으로 어떤 생명들은 아예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없애져야만 하는지요?', '한 번 대면해 본 일도 없는 모체 내의 태아를 무슨 이유로 없애버려야만 합니까?' "만일 쇠 연장으로 남을 쳐 죽였으면, 그는 살인범이다. 그러므로 그 살인범은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한다"(민수 35,16).


 화초나 잡초라면, 필요하고 키우고 싶은 것만을 두고 나머지 것을 뽑아버려도 좋겠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사람의 생명'을 '사람'의 뜻에 의해 마음대로 없애버리는 것은 분명 죄악입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다. 불임환자의 경우, "남편이 3대 독자인데…", "남편이 7대 독자인데…" 하며 아기를 갖고 싶어 부부가 합심해 끈질기게 노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생명을 앗아가기는 쉽지만 결코 마음대로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들도, 지켜보는 의사도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을 사람의 힘으로 인공적으로 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자만심이 절정에 이른 이 시대에, 한 생명의 탄생을 위한 노력이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우리 인간은 인간의 자만심에 대해 신중히 뉘우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 된 여성에게 출산에 대해 물으면 인공유산까지 해 가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 몇 년 더 있다 아기를 낳을 계획이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생식기의 각 부분이 언제 병들어 그 기능을 잃거나 혹은 제거해야 할 경우가 생길지 모르는 데도 말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겨 불임의 몸이 될지 그 외 어떤 일이 닥칠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어찌 그리도 하느님 앞에서 자신만만한지 알 수 없습니다. 
 열한 번이나 인공유산을 한 경력으로 그 후 6년 동안 기다려도 원하는 임신이 되지 않아, 아기를 가져 보려고 고심하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열 번이 넘도록 생명을 주실 때에는 마다해 중절수술을 하고, 본인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하니 그 때에는 꼭 임신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잘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생식기관에 장애가 생겨,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계획을 잘 하려다 뒤늦게 가족계획의 완전한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경우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사소한 일에는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오히려 큰 일에는 무심해 버리는 일도 있고, 일의 선후를 바꾸어 질서를 깨뜨려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생명에 대한 섭리야말로 우리 인간 세상에서 가장 잘 지켜야 하는 질서체계가 아닐까요?


 산과의사로서는 분만에 관여하며 생명의 탄생을 지켜보고 위험에 처한 태아 혹은 신생아에게 대세를 주고 기도했으며, 자궁외 임신 등의 환자를 구하는 불가피한 응급수술의 상태에서 태아의 생명에 대해 가톨릭 신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노력했던 일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편, 부인과의사로서는 암환자들을 보면서 죽음을 앞둔 생명에 대해 새로이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 국립의료원에서 부인과 의사로 있을 때에 만났던 융모상피암으로 투병하다 선종한 '루치아'씨때문입니다.


 장기간 병원을 드나들며 항암 치료를 받던 그녀는 현주소가 청계천 다리 밑이라 했습니다. 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던 그녀를 위해 저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장기간 어려운 항암치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선종해 오랫동안 슬퍼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루치아씨 병상이 회진 때에 비어 있기도 했는데, 틈틈이 어린 딸들을 집에 가서 돌보고 와야 하는 형편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때는 하느님께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에게 더욱 어려운 병을 주시고 또 고통을 이기는 이에게 또 다음 고통을 주신다고 생각했고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병든 육신을 떨쳐버리고 선종한 루치아씨 모습은 평온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루치아씨에게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기약해 주셨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날이 갈수록, 금전과 물질을 중요시 하고 세속에서의 쾌락을 누리다 여의치 않은 환경의 막다른 골목에서는 자기 목숨까지 끊어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 최근 사회의 상황 속에서, 어려운 형편 속에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루치아 모습이 더욱 떠오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 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하시고는…"(루카 12,15).

제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지켜보고 이를 위해 일하는 산부인과가 좋아서 산부인과를 전공했다면, 역설적으로 가톨릭 신자로서 생명을 앗아가는 일에 가담할 수 없다고 생각해 19년의 산부인과 의사 생활을 접고 새로 시작한 병리라고 하는 과목은 제게 흡족한 학문이었습니다.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전공의 수련 당시 가톨릭 신자이셨던 김석환 교수님께서는 산부인과 의사가 곧 유산시키는 사람이 돼서는 안된다고 간간이 일러주셨습니다. 또한 부인과 자체 내에서 조직검사를 직접 하시며, 연구를 병행하셔서 병리에 관심을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후 국립의료원에 근무하면서 스칸디나비아로부터 내한한 의사들을 포함해 임상의와 병리과 의사가 함께 참석하는 병리집담회는 학문적으로나 임상적으로 흥미있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1975년에는 세계보건기구(WHO)와 덴마크 기관(DANIDA)에서 주관하는 3개월간의 '자궁경부 세포학'과, 스웨덴의 병원(Malmoe General Hospital)에서의 흡인세포학(Aspiration cytology) 연수 기회가 있어 더욱 해부병리를 전공하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산부인과 전문의로서 경험했던 융모 상피암으로 죽어갔던 환자 루치아씨, 자궁 경부암으로 어렵게 투병생활을 했던 서울대병원 수련 시절의 27살 젊은 박아무개씨 등 환자들을 생각하며, 해부병리라는 과목은 단지 기초학문으로서뿐 아니라 임상적으로 환자의 치료와 생명에 대한 예후에 크게 기여하는 학문이라 느끼며 긍지를 갖고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19년간의 산부인과 의사 시절에는 하느님께서 생명을 지키는 방법을 보다 더 임상적 체험으로 알려주셨다면, 그 후 27년간의 병리의사로서 생활은 암 환자 등, 어려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의 생명을 오랫동안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학문을 경험하도록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눈에 안 보이는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라면,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체가 설혹 우리 눈에 안 띄는 상태에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그럴수록 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웃 사랑도 중요한 일이라 노력하는데, 나약한 생명들이 알게 모르게 죽어가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 배아 상태에서 고령자에 이르기까지의 생명, 건강한 자와 병자,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그렇지 못한 자, 교육받은 자와 못 받은 자, 이 땅에서 보기에 소위 선한 자와 악한 자, 하느님을 잘 따르는 이와 잘 안 따르는 이 등, 모든 것들을 초월해 우리 인류 각자에게 생명을 흡족히 누리게 하신 것이고 또한 보호하려 하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추호도 이들의 생명을 손상시킬 권리가 없습니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생명 수호의 입장에서 잘 판단해야 할 일입니다. 배아는 당연히 생명입니다. 그것이 수정란이든 복제배아든, 냉동배아이든지 간에 생명체라고 생각합니다. 질병 치유에 이용한다는 이유로, 어느 생명체를 살리고자 다른 어느 생명체를 희생시킨다는 것입니까? 그것도 인간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이유로 생명체인 배아를 희생해 생명을 위한 연구를 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동물의 세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행위라 생각합니다.

 2005년 가을의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교회의 입장',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정식출범' 등의 글을 대하고 공감하며 기뻐했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이러한 교회의 깨우침은 우리 교우들에게 확고하고도 든든한 지침이 될 것입니다.


 많은 기도 중에 우리가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실천이 따르는 신앙생활과 함께 생명에 대해 늘 지혜로운 판단을 가질 수 있는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지혜 11,26).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도 17,25).


평화신문. 가정청소년
상- 2007. 8. 5 [931호]
중- 2007. 8. 12 [932호]
하- 2007. 8. 19 [9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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