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수호 동영상 공모전

제4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공모전 수상작 대상

관리자 | 2016.08.10 13:27 | 조회 2916

제4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공모전 수상작

 

대상 '라파엘라가 말하길, "프란치스코야, 환영해!"'

 

평화방송ㆍ평화신문과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가 '생명수호 생명사랑'을 주제로 공동 주최한 제4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연재한다. 생명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가슴으로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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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환마마보다 추위를 더 무서워하는 제게 지난 겨울은 혹독했습니다. 게다가 올해는 봄의 행보가 이토록 더디니 무척이나 고통스럽습니다. 3월도 봄을 전해주지 않아서 제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 참이었습니다. 3월이 다 저물어가자 저는 기다림조차 잃었습니다.

 일이 한 시간 정도 일찍 끝나 아이들의 피아노학원 앞에 차를 세우고 차창을 엽니다. 지나가는 차량들의 소음보다 먼저 차창을 넘어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봄입니다!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는 시인의 말처럼 올봄은 꼭 그렇게 제게로 왔습니다.

 

 넷째 아이 프란치스코가 엄마를 발견하고 달려옵니다. 손등이 온통 초록 물감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난 꽃씨 심는 사람이 될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열 살 배기 사내아이입니다. 뛰어난 정원사를 일컬어 서양 사람들은 '초록색 엄지'를 가졌다고 하는데, 손등을 온통 초록색으로 물들인 아이가 장차 무엇이 될는지, 아이가 마당에 심어놓은 한련화의 만개를 기다리는 마음보다 흥미진진합니다.

 

 10년 전, 이 아이가 태속으로 찾아든 것을 알았을 때, 남편은 아이를 포기하자고 말했습니다. 조산(早産)의 위험을 면하고 셋째를 낳은 것이 채 1년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중증장애를 가진 첫 아이 라파엘라를 돌보는 긴 세월 동안 소진된 몸은 세 번째 출산 후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임신은 그래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임신 여부가 아직 명확하지 않던 무렵, 저 역시 임신이 아니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주변의 우려와 제 안에 고이는 우려가 겹치고 섞여서, 그해 봄은 라파엘라의 등하교 길에 노란 희망의 빛깔로 도열한 개나리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심란하던 마음은 희한하게도 의사 선생님의 입에서 임신 선고(?)를 받던 날 말끔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임신을 명확히 인지하게 된 모성이 온 몸을 '임신 유지 모드'로 전환시킨 것만 같았습니다.

 "열 달 후에는 세 아이처럼 우리에게 끔찍이 소중한 존재가 될 텐데,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아이를 낙태시킬 수는 없어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제가 아니라 제 안의 그 모성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넷째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사람들은 네 번째 임신 자체를 놀라워했고, 첫 아이의 장애를 개의치 않고 네 번째 임신을 감행하는 무모함을 신기해했습니다. 그리고 임신 확인 후 5개월이 되도록 병원을 찾지 않는 또 하나의 무모함에 대해서는 우려를 넘어 비난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신을 확인하고 5개월 만에 나타난 저를 보고 의사 선생님은 드러나게 심통을 부렸습니다. 산전검사를 비롯한 기형검사를 해야 할 시기가 훌쩍 지난 때였고, 의사 선생님은 제가 세 아이를 출산했던 대학병원에 진료의뢰서를 써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니까요. 이를테면 저는 그 의사 선생님께 '영양가 없는 고객'이었던 셈입니다. 의사 선생님의 심통은 물론 영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임신부가 마땅히 받아야 할(진정 마땅한 것인지 의문스럽지만) 모든 검사를 거부한 무지몽매한 모성에 대한 의사로서 그의 비난은 일면 타당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남편은 제게 꽃을 선물했습니다. 임신은 저희 부부에게 계획된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기쁨이었으니까요. 저는 다른 모든 임신부들처럼 철분제를 섭취했고, 간염검사를 받았으며, 기형검사에 응했습니다. 세 번째 임신은 기꺼운 인연이었고 임신과 관련된 모든 검사들은 고민과 선택의 문제로 인식되기도 전에 그 기껍고 자연스러운 임신 과정의 일부로 편입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네 번째 임신은 달랐습니다. 뜻하지 않은 임신이었다는 하나의 사실과 넷째 아이를 낳아 기를 만한 정신적, 육체적 여력이 없었다는 또 하나의 사실 때문에 그것은 고민의 상황으로 제 앞에 던져졌습니다. 임신 자체가 고민의 상황이 되자 임신과 관련된 모든 상황들도 고민의 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생명은 그 생명이 지닌 생명력을 떨치도록 보전되어야 하고, 그 보전되어야만 하는 생명에 우열을 매길 수는 없다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생각은 네 번째 임신이라는 현실 앞에서 단순한 생각이 아닌 신념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신념으로 품지 않으면 네 번째 아이와의 인연은 현실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신념은 기형검사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양수검사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임신 5개월이 지나도록 병원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을 저는 의사 선생님께 말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검사에 충실히 임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검사결과에 이상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이를 출산하겠다는 무모한 결심은 더 더욱 말하지 않았습니다. 결심은 굳었고, 그 결심은 의사의 이해나 인가를 필요로 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아이의 정상여부를 검사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부당한 일로 여겨졌던 또 다른 이유,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장애아인 첫 아이와 연관된 것이었습니다. 장애를 가진 첫 아이가 없었다면 저는 별다른 생각 없이 태속의 아이가 정상아인지를 '감별'했을지도 모릅니다. 첫 아이가 열 살이던 그 해, 태속에 자리한 열 살 터울 동생의 정상 여부를 감별한다는 것은 제게 첫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태속의 넷째에게 이상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면, 그래서 임신중절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그것은 첫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산전검사에서 이상을 알 수 있었다면, 너의 삶도 그 순간 중절되었을 거야, 우린 네가 '정상아'라는 확신으로 임신을 유지했던 거야, 그런데 너는 '정상아'로 태어나지 않았어, 넌 현대의학이 걸러내지 못한 '실수'야,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생명은 네게 합당하지 않아…"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고, 생명이 생명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양수검사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듯이 보이는 행위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행위로 그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타당한 낙태가 있다고 말하며 열등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그 미약한 생명이 태어나 창조주께서 정해주신 삶을 누리는 짧은 시간조차도 기다려주고 지켜봐주지 않습니다. 강을 죽이고, 생명들을 죽이고 기어코는 인간을 죽이는 세태에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으니, 암묵적으로 그 모든 살생에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열등한 개체는 자연도태 된다는 생물학적 진실을 유일한 진실로 신봉하는 사람들처럼 변해있었습니다. 그것도 맹신하는 사람들로 말입니다. 그 맹신자 중에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장애를 가진 큰 아이가 알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큰 아이 라파엘라는 한 마디 말을 할 줄 몰랐지만, 그렇게 자신의 온 영혼과 존재로 넷째 아이 프란치스코를 환영했고 지켜냈습니다.

 

 열등하고 열외적인 생명으로 태어난 첫 아이와 우리 가족 앞에 놓인 삶은 생각보다 버거웠습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에서 입학을 거부당하고, 펜션에서 숙박거부를 당한 일쯤은 우리 삶속의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 일이 되었습니다. '우열'과 관계없이, '다름'과 관계없이 '여기서, 함께' 살아가고자 만든 작은 공동체, 조직이나 단체가 아닌 삶의 터전이 되어주길 소망했던 그 공동체조차 애초의 신념에서 자꾸만 이탈해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공동체 역시 예외적이고 특수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습니다.

 몇몇 전문가나 혹은 불특정 다수에게 공동체의 신념과 운명을 맡기지 않는 주체적인 공동체, 내 안의 하느님과 내 아이들과 내가 가진 것들, 진정한 나의 것들에게만 호소하는 정직한 공동체, 서로의 아픈 아이를 함께 돌보고 서로의 무거운 삶을 함께 떠받치며 서로의 저녁식탁에 가지무침 한 접시를 올려놓아줄 수 있는 아주 작은 공동체, 목도리를 두르지 않아도 그저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 차림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면 찬바람이 목덜미를 넘어 들어오기 전에 그 '서로'의 문 앞에 이를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공동체, 특정한 신념과 목적을 공유하고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 삶 전체를 함께 살아가는 생활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가득 고여 넘치려하고 있었습니다. 큰 아이 생일을 맞은 지난 가을, 저는 네 아이를 데리고 우리의 특수하고 예외적인 삶으로부터 잠시의 일탈을 시도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목장 초지 위에서 부동 자세로 서있던 양들의 침묵, 비바람과 함께 포효하는 동해의 장관, 청송의 사과 과수원, 짧은 동행을 부탁하던 국도변의 촌로(村老), 유서 깊은 도산서원과 하회마을, 지리산의 둘레길, 호방한 사내 같은 화엄사와 그의 연분 같은 어여쁜 쌍계사, 그리고 늦가을 아쉬운 햇살을 한껏 품고서 차나무를 키워내는 쌍계계곡의 고즈넉함… 짧은 일탈의 시간 동안 우리가 만났던 수많은 것들의 대략일 뿐입니다.

 5박 6일 여행 동안 만난 식당 아주머니와 경관 아저씨, 그리고 과수원 노인은 저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이들의 엄마라고 해명을 해도 믿어주지 않았지요. 보육원의 아이들을 돌보는 선생님이 자신을 '엄마'라는 갸륵한 호칭으로 소개한다고 생각들을 하시더군요. 한두 사람도 아니고 세 양반이 같은 소리들을 하시니, 네 자녀를 둔 '막강가족'의 자긍심에 찬물을 끼얹는 서글픔이 몰려왔습니다. 어디를 가도 우리는 별나구나, 사람들은 우리를 별나게 보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충남 운산에 계신 외숙부님 댁을 찾아뵙는 것이었습니다. 태백의 한 공동체보다도 기실 가장 찾아뵙고 싶은 분들은 그분들이었습니다. 현대의학이 온 세상의 산모들을 지배하기 전에 첫 아이를 낳으신 외삼촌과 외숙모, 그분들은 지능이 평균치(?)를 밑도는 큰 아들과 농사를 지으며 평화로이 살아갑니다. 나이 마흔이 넘은 아들입니다. 이제 짝을 지어 줄 마음도 접으신 것 같고, 큰 아들과 관련해서는 시간과 함께 삶이 흘러가는 것을 무기력과 무책임으로 자책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부모가 건강하지 못하게 태어난 자식을 바라보며 느꼈을 고통이 어찌 무겁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 고통이 그분들을 짓눌러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와 크고 대단한 것을 추구하는 그 도시의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 까닭에 아무도 이들 가족의 삶을 재단하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세 사람은 그저 아침 해가 솟아오르면 달래 밭에 자신들의 발자국을 선명하게 찍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들의 존재는 대지 위에 그렇게 선명하게 인장을 남깁니다. 흙 고랑에 그들 존재의 무게만큼 패인 발자국은 비와 바람이 그것을 흩트리기 전까지는 아무도 흩트리지 못합니다. 저는 그분들의 드러나지 않는 커다란 용기가 부럽고 작지만 단단한 평화가 부럽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용기와 평화가 깃발처럼 가볍게 펄럭이는 외침이 아니라 그분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그분들의 삶과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에 숙연해집니다. 해마다 한식 때면 찾아뵙곤 하던 그분들을 올봄에는 찾아뵙지 못하니 더 그립습니다.

 

  부활시기, 참된 생명과 새 삶에 목마른 이 봄에 너무나 그리운 분들입니다.

 

 

평화신문 [1070호][201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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