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수호 동영상 공모전

제4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공모전 우수상 '생명에 관한 이야기'(상)

관리자 | 2016.08.10 13:29 | 조회 2821

제4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공모전 우수상 '생명에 관한 이야기'(상)

평화신문 [1072호] [2010.06.13]

 

김현희(아녜스, 미국 뉴저지 성백삼위한인본당)

 

 

 

미사 말미에 주보에 난 공지사항을 꼭 알려주시는 신부님의 공지 중에 귀에 쏙 들어온 공지가 평화신문이 주최하는 '생명수호 체험수기 공모'였습니다.

 

 저는 거창하게 어떤 단체에서 생명수호를 위해 힘쓴 일이 한 번도 없는, 성당에서도 눈에 띄지도 않는 신자 중에 한 명일 뿐입니다. 이런 저에게 이 '생명'이란 말이 싱그럽고도 아프게 들어온 것은 순전히 제 자신의 못난 경험 때문입니다. 저처럼 뜻하지 않게 타국에서 살다가 죽음의 문고리를 잡았거나, 잡고 싶은 누군가에게 희망의 씨앗이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풀어 보려고 합니다. 지난 연말에 저는 구질구질한 제 삶의 마침표를 찍고 싶어 두 번째로 목을 매었습니다. 제 이야기는 생명을 함부로 했던 제 자신이 하느님께 하는 고해입니다.

 

실패 또는 희망

 

 1995년 5월 백일을 지난 딸아이와 베란다로 길게 스며드는 5월의 햇살과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증권업에 종사하는 남편은 늘 스트레스가 많았지만 유능한 남편의 수고로 어린 딸아이와 함께 걱정이라는 걸 모르는 평탄하고 게으른 아내로 하루하루를 철부지나 다름없는 여자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늘 급박해 보이고 흡연량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겪는 일이 아니라 그 정도를 가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에도 뭔지 모를 불안감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그해 5월의 세 번째 주말, 친정 어머니 회갑 기념 가족여행을 펑크 내고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미국 비자가 없었던 딸아이를 시집에 맡겨두고 옷가방 하나 들고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살던 아파트에는 아침에 빨래한 딸아이의 손바닥만한 옷가지들을 널어둔 채 젖비린내가 풍기는 아기를 떼어 놓고 뉴욕에 도착한 저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모든 상황들이 비현실적인 꿈만 같았습니다. 유학 중인 남편의 대학 선배 아파트에서 아침에 깨어나면 꿈에서 깨어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 같은 헛된 희망은 사라지고 담담하고 밝은 아침이 뉴욕의 낯선 창 밖에 조용히 와 있곤 했습니다.

 

 1995년 5월과 6월은 참으로 비현실적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간들이 우리 곁을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7월이 되어 딸아이를 데리러 서울로 간 저는 우리가 두고 온 모든 현실들이 그곳에 있는 가족들에게 깊고도 많은 상처를 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딸아이를 데려오지 못하고 혼자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늦가을 아이를 데리러 다시 서울로 갔습니다. 이미 한국에서 아이 비자를 받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브로커를 통해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국경을 넘는 길을 택했습니다. 밴쿠버에는 우리 모녀 말고도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단체관광객으로 위장해 밴으로 함께 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를 인솔하는 브로커는 국경을 넘을 때 행동수칙과 국경에서 빠르게 밴에서 내릴 수 있도록 좌석을 배치했고, 우리는 각자 좌석을 지정받아 타고 내리는 연습을 몇 차례 하기도 했습니다. 10개월짜리 아기를 멜빵으로 매고 일행에 섞여 움직이고 있는 저는 민첩하게 움직일 수도 없었고,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여행객으로 가장했기에 밴쿠버 시내를 하루 돌기도 했지만 일행 중 누구도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밴쿠버의 풍경을 즐기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마치 고무줄을 힘껏 잡아당겨 놓은 것처럼 긴장되어 금방 뚝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이상한 여행객은 이미 국경수비대의 감시망에 걸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국경수비대에 쫓겨 국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공항에서 우리를 떠나 보내며 눈물짓던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쉬고 있는 모텔을 나와 뉴욕에서 나보다 더 불안에 떨고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때 내 마음은 이미 뉴욕이 아닌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이 서 있었습니다. 밴쿠버에서 본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이 있어 보였고, 사람들 모습에서 그 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이 읽혀지기도 했습니다. 여고생에서 노년의 사람까지 모텔에서 이리저리 긴장과 피로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런 불안이야말로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주일이 되도록 국경을 넘지 못하던 우리는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하고, 밴쿠버로 날아온 남편과 함께 동부의 토론토로 날아갔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브로커를 통해 나이아가라 상류의 강을 밤시간을 이용해 건너기로 하고, 남편은 비행기 편으로 우리 짐가방을 가지고 뉴욕으로 돌아갔습니다. 점잖아보이는 노신사 한 분이 우리를 동행했습니다. 소설에서나 읽었던 칠흑같은 어둠을 강 위에서 보았습니다. 무섭도록 고요하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간에 딸아이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정적이 조각나듯 아이 울음소리가 어두운 강 위를 쩌렁쩌렁 울려퍼졌을 때, 순간적 두려움으로 아이를 조여 안았습니다. 그때 동행하던 노 신사는 "새댁, 그렇게 하면 아기 큰일나요… 아기를 풀어줘요." 조용하고도 따듯함이 묻은 음성이었습니다. 긴장으로 조였던 아이를 풀자 아이도 곧 울음을 멈췄고, 강을 건너고 비현실에서 현실로 건너온 것처럼 뉴욕으로 와 있었습니다. 아이와 뉴욕으로 온 저는 긴 터널 끝에 쏟아지는 빛줄기를 본 것처럼 희망이 반짝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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