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수호 동영상 공모전

<언플랜드>와 함께 하는 제5회 생명수호 체험수기 공모전 장려상 : 우선순위를 '새로 고침'

관리자 | 2020.10.07 11:42 | 조회 1751

우선 순위를 새로 고침

 

김정은 로사(동대문)

 

4, 5학년쯤. 초등학교 때였다. 내가 다니던 본당 주일학교에서 전 학년을 모아 낙태를 주제로 한 생명 교육 특강을 열었다. 조명을 끈 컴컴한 제대 쪽, 중앙의 십자고상을 가린 밝은 스크린 위로 1보다 작은 두 발을 비롯해 낙태 후의 잔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꽤 심각한 장면을 어린 나이의 내가 어떻게 봤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30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도 생생하게 기억 남는 건 열정적인 강사가 마지막에 확인차 던진 질문이었다.

 

여러분 이제 아시겠죠? () 그래서 낙태는 하면 된다, 안 된다? (안 돼요~) , 손을 들어보세요. 1번 절대 안 된다, 2번 경우에 따라 할 수도 있다, 3번 해도 된다.”

 

자신만만 손을 번쩍 든 우리를 보고 강사는 깜짝 놀라 잠시 정지했다. 커진 눈으로, 허탈하게 호통치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여러분! 그동안 제 말을 다 뭐로 들으신 건가요!! 낙태는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포함해 많은 친구가 2번에 손을 들었다. 보통 시험을 볼 때, 객관식 문항에 절대란 말이 들어가면 틀리기 쉬웠다. 그런 자비 없는 단어보다 경우에 따라라는- 여지가 있는 표현이 붙으면 답인 적이 많았다. 2번에 확신을 가졌던 나는, 내가 틀렸다는 것과 절대란 말이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낙태는 산모의 건강 상태와 양육 의지에 따라 결정할 수도 있는 것이 당시 내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건 우선순위가 틀린 답변이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면 낙태는 절대하면 안 되는 것이다. 어린 마음에 그럼 하느님은 낙태를 아예 못 하게 하시지, 왜 사람들이 죄를 짓게 하실까?’-하며 불평했다. 하느님의 마음이 궁금했다.

 

중학교 사회 수업 시간, 낙태 주제는 내 앞에 다시 등장했다. ‘임신 중 알게 된 태아의 장애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맨 뒷줄에 앉은 내가 교단에 서 있는 선생님께 질문했다.

 

장애가 있다면 태어나지 않는 쪽이 태아와 가족에게 더 좋은 것 아닌가요?”

주장에 가까운 내 도전적인 질문에 사회 선생님은 차분하고 단호하게 답했다.

 

그건 타인이 판단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 답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순간이 또 내 안에 저장됐다.

 

20대의 나는 방송 제작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고 한 장애인 프로그램의 일원이 됐다. 장애가 있어도 밝고 희망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방송사 복지기금과 연결해 필요한 걸 지원해주는 사회공헌 성격의 프로그램이었다. 그 안에서 매일같이 장애인을 대상으로 섭외와 취재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예상보다 많은 장애인이 자신의 인생을 꿋꿋하게 꾸려가고 있다는 것과 그런 그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정말 내 생각이 짧았구나-’ 하고 반성할 즈음 동료들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미 자녀를 키우고 있는 천주교 신자인 PD와 선배작가에게 만약 임신 중, 태아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이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답을 듣고 이번엔 내 눈이 커졌다.

 

둘 다 고개를 저었다. 출산할 수 없다고 했다. 장애인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지 가깝게 지켜봤기 때문에 더 키울 자신이 없다고 했다. ‘긍정적으로 잘 사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다. 평범한 사람은 어려운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나는 교만하고 순진했던 걸까? 하지만 그 후로 생각이 실타래처럼 이어졌다. 태아가 장애가 있어서, 딸이라서’, 부모가 약해서, 가난해서, 아직 어려서, 학업 때문에, 이미 애가 많아서, 이혼할 거니까처럼 바깥세상의 판단으로 침묵 속에 사라진 생명은 얼마나 무수히 많을까.

 

20194, 우리나라에서 낙태를 처벌하던 법의 효력이 잠시 정지됐다. 언론에선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한 여성단체의 찬성 입장과 생명단체의 반대 입장의 갈등을 전했다. 그즈음 난 안국역 근처에서 일하느라 헌법재판소 앞길을 자주 지나갔는데, 입구에는 낙태는 살인이라는 구호를 몸에 걸고 매일같이 1인 시위를 하는 분이 있었다. 그는 신앙인은 최선을 다해 낙태를 막아야 한다고 온몸으로 말하는 듯했다. 난 그 앞을 조용히 지나치며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 성당에 들어갔다.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깜박거렸던 두 눈을 질끈 감은 느낌으로 미사를 봤다. 성전 밖을 나오자 또다시 로비에 비치된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운동종이 앞에 서게 됐다. 펜을 들고 망설이다 결국 이름을 쓰지 못하고 돌아섰다. 나는 신앙인의 양심에 따라 낙태는 반대하지만 낙태죄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지 몰랐다. 낙태죄 찬반 사이에서 난 어디쯤인 걸까. 헤매고 있었다.

 

요즘 어린이들은 흰 도화지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크레파스로 그림 그리는 것이 영 난감하다고 한다. 디지털 기기에 쉽게 쓰는 뒤로 가기’, ‘취소기능이 없는 상황이 불편한 것이다. 아이들뿐이랴. 선택과 결정을 두려워하는 어른들도 초기화시켜주는 새로 고침기능 안에서 안심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고의적 유산을 선택한 여성의 삶은 겉으로는 멀쩡하게 새로 고침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낙태 이후의 삶은 더 이상 낙태 이전과 같지 않으며 마음 안에 죄의식의 잉태가 시작된다는 것이 낙태 경험자들의 공통된 메시지다. ‘그것만으로도 여성의 영육은 충분히 벌을 받는 건데 거기에 까지 짊어지우는 건 더 가혹한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 질문에 <언플랜드>우선순위에 실마리가 있다는 걸 알려줬다.

 

주인공 에비는 가족계획연맹의 의로운 일원이 되는 첫날 배가 조여 오는 느낌을 기억했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을 부모님께 설명하지 못했다는 고백으로 비추어보면, 그녀의 양심에 이미 실낱같은 균열이 시작된 것이다. 그 균열은 처음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약해 보이지만 서서히 강력한 동아줄이 되어 에비를 압도한다.

 

운명의 10이 그랬고, 연맹 대표인 셰릴의 우선순위가 그랬다. 낙태 수술을 늘려 실적을 올리고 이윤 창출을 더 내라고 압박하는 셰릴에게 에비는 저항했다. 가족계획연맹이 비영리단체임을 재차 확인하자 셰릴은 경영자로서 비영리는 세금의 영역이라고 간편하게 정리한다. 결국 자신의 선의와 진정성을 믿고 화려하게 고속 승진해온 에비는 거대한 모순의 벽을 마주한다. 리더와 자신의 우선순위가 반대되는 것을 알고 난 후 절망감을 느끼는 장면은 여운이 오래 남았다.

 

에비는 생명이신 하느님대신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을 구조하고 보호하며 점차 낙태를 줄이겠다는 자신의 비전과 선의를 믿었다. 그 후 승진을 앞둔 에비는 내적 갈등을 외면한 채 답정너가 되어 하느님께 책임을 하청하고 뒤로 빠진다.

사실 익숙한 모습이다. 나 또한 에비처럼 종종 필요에 따라 선의로 포장한 이익과 편의를 앞세우며 하느님을 외면한다. 기도할 때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의 입장으로 시작하지만 그 전능함의 유혹에 빠져 이런저런 요구를 늘리고 주인행세를 한다.

에비는 하느님을 등진 채 멀어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높이 올라갔지만 생명을 우선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자 더 강한 반동으로 깊이 회개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 과연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였다.

 

2000년대 에비의 실제 이야기는 실존 인물이자 지난 2017년 사망한 노마 맥코비 Norma McCorbey’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낙태가 불법이었던 1960년대에 낙태를 시도하다 재판까지 하게 된다. 결국, 아이를 출산하면서도 4년 뒤인 1973년 승소하며 낙태가 합법화되는 계기를 만든다. 하지만 그 후 2,700만 명이 넘는 태아들이 낙태됐다는 사실 앞에서 그녀는 무너졌다. 심지어 자신이 승소한 재판을 번복시키며 낙태죄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했고 낙태를 반대하는 단체에 들어가 선봉에 섰다.

 

이제 우리 사회를 본다. 20209월이 되면서 낙태죄를 개정할 수 있는 기한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있다. 다시금 낙태죄 찬반의 입장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언론은 갈등을 예열시키고 있다. 최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법무부의 낙태죄 완전 폐지방향의 입법 추진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국회 내에선 시급한 현안에 밀려 낙태에 대한 구체적 입법 논의가 계속 미뤄진다고 한다. 그사이 임신 중지 수술 의사들의 무죄 판결은 이어지고 있다.

 

다시 내 안의 목소리가 나에게 묻는다. 이번엔 선택을 종용하지 않는다. 여러 우선순위가 중첩된 찬성과 반대프레임도 아니다. 내 기준은 이렇다.

 

나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인가? 하느님이 아닌 것인가?’

 

하느님은 나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시고 기다리신다. 나는 당장 눈앞의 편안함을 조급하게 따라가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우선순위를 하느님 중심으로 새로 고치고 있다. 하느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은 생명을 택할 리 없고 자기모순에도 빠지지 않는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고 도와줄 방법을 찾는다. 이건 제3의 선택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보기 싫은 찬반 갈등도 찬찬히 하느님의 눈으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만약 식별을 잘못해 그릇된 선택을 한다 해도 괜찮다. 이것만은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꾸준하시고 나를 통해서 하실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갖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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